호주의 와인 브랜드 19크라임스 19crimes. 이름부터 심상치 않지요?
대체 와인에다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은데, 매년 200만 병씩 팔린다고 하네요-?
사람들이 대체 왜 이 와인에 빠진 건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
Chapter 1.
호주를 개척한 죄수들, 와인으로 재탄생하다
2012년 호주의 와인 회사 트레저리 와인 에스테이트TWE·Treasury Wine Estates는 한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와인 업계가 점점 지루해져 가는 게 고민이었지요. 젊은 소비자들에겐 와인이 ‘재미없는 술’이 돼버린 거예요.
TWE는 재밌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기로 마음먹었어요. 전통적인 와인 마케팅 규칙은 하나도 따르지 않기로 했지요. 와인 비평가와 협업 하지도, 유명 매체에 광고나 홍보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와인 박람회에도 참가하지 않았어요.
“세상엔 수십만 개의 와이너리와 와인 브랜드가 있어요. 소비자가 보기엔 그 와인병이 그 와인병 같아 보이죠. 라벨에 정보도 많지 않아요. 그럼, 뭘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우리는 소비자의 눈에 들 방법이 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어요.”
_밍 알터만 TWE 이사, 2020년 ptc 사례연구에서
TWE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호주가 시작된 역사적 배경. 잠깐, 호주라는 나라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아세요? 호주는 18세기 영국이 범죄자들을 보내던 유배지 였어요. 19가지 죄 목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강제 이주 처벌’이 내려졌죠. 이들 중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일랜드인에겐 독립투사, 호주인들에겐 개척자인 사람들이지요.
그렇게 1788년부터 1868년까지, 16만5000여명의 죄수들이 호주로 보내졌습니다. 19가지 범죄, 익숙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19크라임스의 모티브는 바로 이 죄수들이에요. 와인 병마다 실제 죄수들의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황무지를 개척한 사연 있는 범죄자. 확실히 궁금하긴 하네요.
“우리 와인엔 호주로 강제 이주 처벌을 받은 실제 역사적 인물, 예술가 및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19크라임스는 개척자들의 구원을 향한 여정에 집중했어요. 그들은 역경을 극복하고 호주의 새로운 민족정신을 구축했습니다.”
'19크라임스'라는 이름은 강제 이주 처벌을 내리던 18세기 영국의 19가지 죄목을 의미한다. ⓒ19Crimes
Chapter 2.
한 병 한 병, 생생한 스토리로 브랜딩하다
19크라임스는 8명의 죄수의 이야기를 담은 8종류의 와인을 출시했습니다. 와인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정체성을 부여했지요.
그런데 진짜 범죄자를 기리는 와인이라니. 이래도 되는 걸까요? 일단 19개 죄목이 뭔지 찾아봤습니다. 19크라임스 코르크 마개 측면에 랜덤으로 죄목이 적혀있거든요.
방화나 폭행 같은 강력범죄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닌 것도 있었어요. 편지 절도부터 중복 결혼, 1실링(약 83원) 이하의 절도까지도 19개 죄목 중 하나였더라구요? 여기에 영국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던 아일랜드 사람들도 ‘강제 이주 처벌’을 받았다고 해요. 그러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지 얘기를 좀 들어봐야 한단 거죠.
19크라임스의 ‘레드 블랜드’ 제품 라벨의 주인공, 존 보일 오라일리John Boyle O'Reilly. 그의 얘기를 먼저 들어볼까요?
“철창 안에 서서 악마의 소음과 소름 끼치는 절망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만이 죄수선에 갇힌 공포를 상상할 수 있다."
_존 보일 오라일리, 죄수선에서 쓴 시 「더 플라잉 더치맨」의 초안
오라일리는 아일랜드 출신 시인입니다. 1867년 강제 이주 형을 받았어요. 대기근으로 굶주린 아일랜드인들을 대변해 영국에서 반란을 일으켰거든요. 그는 호주로 가는 험난한 여정 내내 시를 썼습니다. 호주에 도착한 후 교도관을 속이고 미국으로 탈출했다고 해요. 보스턴 신문 ‘필로트’의 편집장과 작가로 살며, 아일랜드 공동체를 대변하는 언론인이 됐지요.
“나는 한때 영국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아일랜드 중범죄자이며, 이 변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_존 보일 오라일리, 1863년 마운트조이 교도소 벽에 새긴 문장
다음은 ‘까베르네 소비뇽’의 마이클 해링턴Michael Harrington. 그는 오라일리가 호주에서 계획한 탈출 작전에 함께한 사람이에요. 1876년 동료 6명과 함께 노 젓는 작은 보트로 거대한 태풍을 이겨내고 미국 포경선에 탑승했습니다. 이 사건은 ‘카탈파 구출 작전Catalpa Rescue’으로 불리며, 호주 역사상 가장 대담한 탈출로 알려져 있어요.
19크라임스는 역사에 기록된 실제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와인에 담았다. ⓒ19Crimes
페르소나를 드러낸 디자인
사연을 듣다 보니 실존 인물들이었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죄수들의 이야기에 몰입을 돕는 장치가 하나 더 있어요. 바로 와인병 디자인.
다른 와인들처럼 반짝이는 유리병이 아닙니다. 무광 코팅 처리해, 빛이 반사되지 않는 검은색 병이죠. 내용물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누렇게 바랜 것처럼 연출한 라벨 만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라벨은 불에 그을린 것도 있고, 오래된 공문서처럼 보이는 것도 있어요. 품종이나 맛을 설명하는, 와인 자체에 대한 정보는 다 빼버렸죠. 대신 세월이 흐른 것마냥 스크래치 자국이 가득합니다.
마치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모습. 진열대에 놓기만 해도 눈에 띄어요. 소매업체들이 이런 와인병은 처음 본다며 환영했다고 해요. 19크라임스 하나만 가져다 놔도 고객이 와인 코너에 오래 머물게 되기 때문이었죠.
맛도 컨셉에 충실합니다. 먼저 오라일리 와인인 ‘레드 블랜드’ 맛 설명을 볼까요? ‘도전적이며 대담한 성격에 타협하지 않는 결코 잊지 못할 맛’이라 평하고 있어요! 저항의 맛이 궁금해지는군요.
저는 제임스 킬리James Kieley라는 인물이 라벨에 붙은 ‘쉬라즈 2018’을 마셔봤어요. 제임스 킬리는 아일랜드 공화당의 형제단 단원으로, 영국의 통치에 맞서 싸웠습니다. 형무소에 갇혀서도 아일랜드 포로 6명을 탈출시키다가 잡혀서 호주로 추방됐지요. 1905년 영국 국왕으로부터 사면 받았고, 이후 호주 개척자의 삶을 살았다고 해요.
와인 맛은 어떨까요? 일단 색은 아주 진한 루비 빛이에요. 향은 당도 높은 자두로 만든 잼의 향이 물씬 풍깁니다. 의외로 반전은 강렬한 단맛에 높은 산도가 더해져 아주 새콤달콤하다는 것. 제임스의 이야기만큼, 강렬한 와인!
18세기 영국은 도시에서 증가하는 범죄자 수를 감당하지 못해,
그들을 미국과 호주 같은 식민지로 이주시켰다. ⓒ19Crimes
Chapter 3.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다
패키지와 맛까지 스토리에 충실하게 기획한 19크라임스. 여기에 유명해진 결정적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19크라임스는 최초로 AR(증강 현실) 기술을 도입한 와인이에요. 라벨에 붙은 죄수를 현실 세계로 소환한 거죠.
전용 앱을 다운받아 라벨을 스캔하면 라벨에 있던 초상화의 얼굴이 움직이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고통과 고문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하고, 당시 자신이 썼던 편지를 읽어주기도 해요. 와인을 설명하거나 홍보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뿐이에요.
“사진을 실은 라벨은 매력적이었지만, 더 깊이 파고들수록 역사적 선구자들의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되었죠. 우리는 증강 현실 와인 라벨로 역사적인 식민지 개척자들이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게 했습니다.”
_존 워들리, 19크라임스 부사장, 2023년 뉴푸드매거진 인터뷰에서
19크라임스의 앱은 성인 대상 AR 마케팅의 성공 사례로 평가 받습니다. 그전까진 AR은 주로 아동 콘텐츠에만 쓰였거든요. 2018년, 브랜드 활성화 마케팅 캠페인의 최고 수준의 성과를 인정하는 ANA(Association of National Advertisers)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슈퍼레지Super REGGIE 상을 받았죠.
지금은 많은 브랜드들이 19크라임스를 따라 AR 기술을 적용했어요. 하지만 19크라임스처럼 효과적으로 쓴 곳은 잘 없습니다.
“19크라임스의 마케팅 성공 비결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라벨을 거대한 QR 코드로 생각하고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정보를 보여주죠. 라벨과 동일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만족하거나, 더 나쁜 경우 그저 웹 페이지로 연결합니다.
증강 현실은 브랜드의 세계와 상상력을 보여주는 창이어야 합니다. 동일한 정보를 다른 형태로 제공하는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_피에르 니콜라스 슈왑 인투더마인즈 이사, 인투더마인즈 블로그에서
19크라임스는 AR기술을 사용해 라벨 속의 인물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도록 했다. ⓒ19Crimes
19크라임스는 생생한 스토리텔링으로 마케팅을 이어왔습니다. 죄수들의 이야기로 시작한 브랜드. ‘규칙 위반’과 ‘반란’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삼았죠.
2023년 19크라임스는 도발적인 핼러윈 마케팅을 선보였어요. 바로 와인을 무덤에서 숙성시키는 것! 묘지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제대로 '규칙 위반'이죠. 19크라임스는 실제로 타워 햄릿 공동묘지에 와인을 묻었습니다. 레드 와인 100병을 참나무 관 안에 넣어 지하 6피트(약 1.8미터) 밑에 안치했지요. 죽은 자들 사이에서 숙성된 와인이라니. 귀신이라도 붙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흠칫하게 되는데요.
사실은 19크라임스도 걱정됐나 봅니다. 혹시나 나타날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비해 성직자가 와인을 발굴하도록 했거든요. 그리고 와인 출시 전 퇴마사 이안 로먼Ian Lawman을 초대해 관에서 숙성된 와인의 첫 잔을 테스트하려 했어요. 퇴마인지 시음인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퇴마사는 와인을 만지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대요.
“그 와인을 시음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하 6피트의 시체 사이에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어요. 유령은 경계가 없습니다. 그들은 변신하고 벽과 유리를 통과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제 생각에 19크라임스는 그것을 그냥 묻어두었어야 합니다.”
_퇴마사 이안 로먼, 2023년 팡고리아 인터뷰에서
관에서 꺼낸 와인, 퇴마사도 무서웠을까요? 저도 마셔보고 싶은 마음이 방금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다행히 귀여운 버전의 핼러윈 와인도 있어요. 유니버설 픽처스와 협업해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와인을 만들었거든요. 핼러윈에 출시한 이 한정판 와인엔 야광 라벨이 붙어 있어요. 어두운 곳에서 몬스터의 얼굴이 형광 초록색으로 빛나죠.
- 2편에 계속
- 출처, 롱블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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