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회 최정윤 : 한식을 주인공으로, 세상에 없던 힙한 풍경을 만들다 (1편)

차승희 신라호텔 F&B 플래닝 인차지

요리가 좋았던 20대 셰프는 궁금했다고 합니다. ‘레시피 대로 했는데, 왜 내 요리는 선배 요리만큼 못하지?’. 답을 구하던 젊은 셰프는 창의적인 요리의 대가가 설립했다는 요리과학연구소에 입사했어요. 과학자들과 식재료와 조리법의 원리를 분석했죠.

이번에도 의문이 하나 피어오릅니다. ‘우리 한식 밥상에도 기초 연구가 이뤄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샘표에서 우리맛연구소의 헤드셰프로 전통 장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연구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요식업, 문화, 인문학계 인재들을 불러모아 고기를 굽고, 옛 고서를 읽고,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셰프로 시작해 연구가로, 이제는 커뮤니티 빌더까지. 기획자 최정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Chapter 1.
난로회 : 세상에 없던 한식 풍경을 그리다

2023년 5월, 전라남도 해남의 한 매실농원.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꽃 아래로 기다란 테이블이 놓였어요. 한쪽에서는 고기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 60여명이 테이블에 마주 앉아, 고기구이에 매실주를 기울였어요. 꽃, 음식, 매실주가 어우러진 늦봄의 소풍이었죠. 주류 브랜드 보해양조가 호스트를 맡은 ‘보해 매화꽃 난로회’였습니다.

지난 9월에는, 연희동 박서보재단(구 기지재단)에서 화로를 덥혔습니다. 주차장으로 쓰이던 빈 공터가 다이닝 공간으로 변신했어요. 컨셉은 한국의 가을 정원. 바닥에는 흙과 바위를 깔고, 가을 꽃과 나무를 심었어요. 벽면에는 故 박서보 작가의 손자, 박지환 비디오 아티스트가 준비한 숲 풍경이 비쳤죠.

공간 한 편에 자리한 테이블 위로, 작은 화로 12개가 놓였습니다. 쌈채소 다발을 부케처럼 선물 받은 손님들은 저마다 머리에 갓을 쓴채, 갈비와 복분자주를 즐겼어요. 조현화랑과 기획한 난로회였습니다.


박서보재단에서 열린 난로회. 손님들은 저마다 갓을 쓰고, 비디오 아트가 펼쳐진 곳에서 난로회를 즐겼다. ⓒ난로회

 

공부 모임에 선조들의 풍류를 더하다

난로회는 최정윤 셰프가 2022년 2월 시작한 한식 연구 모임입니다. 벽제갈비, 몽탄, 금돼지식당, 청기와타운, 본앤브레드 등 육류 전문 브랜드 뿐 아니라, 뉴욕 아토믹스, 페루 센트럴, 온지음 같은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까지. 지난 1년7개월간 모임만 32회. 참가자 수는 250명이 넘습니다.

그 모티프는 200년전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모임입니다. 18세기 조선에서는 음력 10월이면 화롯가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곤 했어요. 선조들은 이 모임을 난로회煖爐會라 불렀죠. 전골냄비 가장자리에 고기와 채소를 굽고, 가운데 오목한 자리에 육수를 부어 탕을 끓였어요. 왕가부터 양반, 민가까지 두루 즐긴 식문화였죠. 정조와 정약용도 난로회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어요.

"난로회는 당대 최고 풍류인들의 모임이었어요. 박지원과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은 산수를 보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고, 화롯가에 고기를 구워 술도 한 잔 기울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세상을 바꿨고요. 선조들의 풍류를 오늘날에 불러오고 싶었어요. 한식이 더 맛있고, 새롭고, 재밌어질 수 있는 방법이, 그 안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난로회는 2022년 2월 첫 모임 이후, 한 달에 한 번 꼴로 열렸어요. 장소, 호스트, 모더레이터, 참석자는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큰 주제는 언제나 한식. 외국인에게 K-BBQ를 효과적으로 소개할 안내문을 제작하고, 하이볼처럼 우리 전통주를 칵테일 트렌드로 만들 방안을 토론하죠.


난로회 참가자들은 함께 모여 한식을 연구하고, 함께 요리를 즐긴다. 사진은 난로회의 시그니쳐 전립투골. ⓒ난로회

 

Chapter 2.
한식을 세계인의 대체불가능한 경험으로

‘새로운 한식 경험을 개발하고, 한식을 리브랜딩하는 것.’ 난로회의 목표입니다. 한식이 세계 무대에서 서기 전, 리허설 현장에 가까워요.

①‘고기 구이Gui’  프로젝트

최정윤 셰프는 새 한식 아이템으로 코리안 BBQ, 즉 고기 구이를 택했어요. 비빔밥, 김치, 불고기가 아니라, 왜 하필 고기 구이였을까요?

“일본의 스시는 왜 성공했을까요?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음식이 아니잖아요. 탄수화물에 단백질을 올려준 단순한 조합. 그런데 가격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어요. 10달러 마트 스시부터 1500달러 오마카세까지. ‘대중적이면서 고급화가 가능한 한국 음식이 뭐지?’, ‘제일 비싼 한식 외식 메뉴가 뭘까?’ 누구한테 물어봐도 답은 한우였어요.”

고기 구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이 됩니다. 손님의 눈 앞에서 고기를 구워요. 조리가 끝난 상태로 상에 오르는 스테이크와 다르죠. 생고기째 화로에 올려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가며 익혀냅니다. 지글지글 굽는 소리, 소기름의 온도까지, 하나하나가 공감각적인 퍼포먼스예요. 여기에 막 익혀낸 고기를 바로 먹는 그 행위까지, 한식의 고기 구이만의 문화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최정윤 셰프는 상차림 구성에도 그 고유성이 있다고 봤어요.

“한국 사람은 채소 없이는 고기를 못 먹어요. 고기와 채소의 비율이 5:5에 가까워요. 고기가 테이블 위에서 구워지고, 그 옆에 김치, 장, 장아찌, 쌈채소가 있으면 그게 코리안 바베큐예요. 설명하기 쉽잖아요.”

최정윤 셰프는 난로회의 고깃집 대표들에게 연구 주제를 하나 던졌어요. 조선시대 난로회가 즐기던 메뉴, 전립투골을 현대식으로 만들어 보라는 주문이었어요. 냄비의 가장자리에는 고기를 굽고, 가운데 오목히 들어간 곳에는 탕을 끓이는 음식입니다. 냄비의 모양이 조선시대 군장들이 쓰던 갓, 전립(氈笠)과 닮았다고 해서 전립투골이라 불렀어요.

낯선 이 메뉴, 유명 고깃집의 사장님들도 처음엔 난처해 했어요. 하지만 이내 브랜드마다 메뉴를 개발했죠. 고기 대신 육전을 굽고, 탕에 해산물을 넣기도 했어요. 이때 개발한 메뉴가 벽제갈비와 본앤브레드의 맡김차림 메뉴로 정식 출시됐어요. 매장에서는 메뉴를 낼 때마다, 전립투골의 역사적 의미를 함께 전달하죠.

2023년 들어서는 난로랩을 시작했어요.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 저녁마다 셰프와 과학자들이 모입니다. ‘한국 고기 구이의 과학’이란 주제로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이어가요.

‘고기를 몇 초에 한 번씩 뒤집는 게 가장 맛있는지’, ‘어느 크기로 자르는 게 좋은지’. 변수들을 바꿔가며 고기를 굽고 맛보며, 토론하고 기록해요. 이 데이터를 쌓아 ‘한식 고기 구이 가이드’를 만드는 것이, 최정윤 셰프의 목표입니다.


난로랩은 과학자와 셰프가 모여 구이를 연구하는 모임이다. 한국 고기 구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최정윤 셰프. ⓒ롱블랙

Chapter 3.
②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을 개최하다

난로회가 화롯불 앞에서 나눠온 이야기들은, 이제 난로회의 담장을 넘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2024년 3월 서울에서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이 열리는 겁니다. 올해 농림축산식품부 간담회에서 난로회가 정부에 제안해 추진되는 행사예요.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은 세계적인 셰프와 미식 전문가가 모이는 미식 행사예요. 2013년부터 싱가포르, 방콕, 마카오 등에서 개최돼 왔어요. 2022에는 한국의 모수(15위), 온지음(23위), 밍글스(28위), 본앤브레드(47위) 등 국내 레스토랑 네 곳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난로회는 한식 셰프들의 그 위상에 걸맞게, 이제는 서울에서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이 열릴 때가 되었다고 정부와 서울시를 설득했어요.

내년부터 국내 음식점의 외국인 근로자 고용을 허용하는 정책* 변화 역시, 난로회가 제안했습니다. 외식업계의 부족한 인력문제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일부 지역에 시범도입한다. 100개 지역(기초자치단체 98개, 세종·제주)에서 주방보조 업무로 고용허가제 인력을 고용할 수 있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이 던질 아젠다를, 커뮤니티가 대신한다는 느낌입니다. 최정윤 셰프를 이렇게까지 움직이는 원동력은 뭘까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욕망은 이타심이라고 해요. 요리로 한 단계 성장하고 무언가를 이뤄낼수록, 사람을 또 사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한식은 잘 될 거예요. 한식이 잘 되어가는 흐름 속에, 제가 수혜를 입는다는 게 맞을 거예요. 다만 제 성격이 급해서, 조금 더 빨리, 더 잘 되게 하고 싶을 뿐이죠.”

지난 10월에는 ‘난로그릴마스터’라는 이름의 민간자격증도 등록했어요. ‘이모’, ‘아줌마’, ‘저기요’라고 불려왔던 고깃집 직원들에게, ‘소믈리에’, ‘바리스타’와 같이 이름을 준 겁니다. 내년에는 비영리 사단법인도 설립할 예정입니다.

“위키피디아에 ‘난로그릴마스터’가 등록되는 날을 꿈꿔요. 훗날 누군가 난로회가 걸어온 길을 보며 ‘한국인은 식문화에 진심이구나’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난로회는 고기를 전문적으로 굽는 직원들을 위해 '난로그릴마스터' 민간자격증을 등록했다. 내년엔 비영리 사단법인도 설립 예정이다. ⓒ난로회

Chapter 4.
서로에게 ‘벗’이 되는, 느슨하고 돈독한 연대

난로회는 매 모임마다 주제를 중심으로 멤버가 다르게 붙습니다. 멤버는 고정된 채  주제가 바뀌는 여느 커뮤니티와 다르죠. 연구 주제에 힘을 싣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친분이나 유명세로 불쑥 끼어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2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도, 직업도 다양해요. ‘한국 고기구이 문화와 그 역사’ 모임에는 『불고기, 한국 고기구이 문화사』의 저자 경남대 이규진 교수가, ‘우리술 믹스올로지’ 모임에는 전통주 구독 서비스와 주류회사 관계자들, 바텐더 등이 모이는 식이죠. 토종닭 연구 모임에는 농부와 파인다이닝 셰프까지 그 경계가 없어요.

그러다 이를 콘텐츠로 기록하겠다는 미디어 업계 사람들이 나타났고, 브랜딩 전문가가 난로회 로고를 디자인 했으며, 누군가는 난로회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요. 대기업과 주류 구독서비스가 협업한 ‘전통주 큐레이션 박스’를 출시하기도 했죠. 이 떠들썩한 모임에 농림축산식품부 담당자들이 구경왔다가, 곧장 간담회가 열렸고요.

“참석하는 모든 분들께 자기소개서를 쓸 것을 부탁드려요. 이를 바탕으로 사전에 충분히 대화하며, 연구 주제에 얼마나 진심인지 살피죠. 모든 참여자의 인터뷰는 제가 직접해요. 각자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모이는 자리잖아요. 영감을 주고 받으며 시너지를 내도록 세팅해야죠.”

 

난로회는 모임마다 멤버가 달라진다. 참석자들은 서로 한식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낸다. ⓒ난로회

커뮤니티의 KPI는 멤버들의 미소

이렇게 모인 멤버들을 난로회는 ‘벗’이라고 부릅니다. 가슴에 명찰 스티커를 붙이고 자리에 앉는 순간 서로의 벗이 돼요. F&B는 물론, 금융, 유통, 마케팅, 디자인, IT, 패션, 예술, 인문학, 농업... 스무 명이 모였는데, 같은 직업이 하나도 없는 날도 있었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벗들이 질문을 하나씩만 던져도, 그날의 대화는 풍부해집니다.

"난로회의 KPI(Key Performance Indicator·핵심 성과 지표)는 ‘벗들의 미소’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는가. 모두가 능동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살아 숨쉬는 커뮤니티어야 가능한 일이죠.

이를 위해 난로회는 모두가 역할을 가지고 모입니다. 
대접받길 바라는 사람은 올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 드려요. 대한민국 최고 고깃집 사장님들이 게스트로 왔어도, 두 팔 걷어 붙이고 고기를 구워요. 질문을 던지고 인사이트를 나누는 것도 1인분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누구도 무임승차하지 않는 모임을 만들어요."

 

서로 다른 영역에 종사하는 난로회의 멤버들. 함께 한식 연구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인사이트를 나눈다. ⓒ난로회 

Chapter 5.
기획자의 부캐, JY투어

한식의 경쟁력을 발굴해온 연구가 최정윤. 요리 인생 2막을 착실하게 걸어가던 그의 안에서 부캐릭터 JY가 고개를 든 건, 2018년 쯤입니다.

“홍대 거리를 둘러보다가 ‘한국의 반찬문화가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식을 파는 식당이 안 보이는 거예요. 온통 양식 아니면 훠궈, 이자카야… 젊은 세대가 이렇게 한식을 안 먹는데 한식에 미래가 있나 싶었어요.”

가격도, 맛도 좋은 한식당을 젊은세대에 알려만 준다면, 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샘표에 30년 이상 근속한 직원들을 상대로, 근처 맛집 설문을 돌립니다. 을지로 일대 백반집들에 별점이 쭉 매겨졌죠.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투어 코스를 구성했어요. 최정윤 셰프가 지인들과 먼저 방문한 뒤, 인스타그램에 ‘JY투어’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겼어요.

“인스타그램 학원까지 다녔어요. 글을 최대한 짧게 쓰라고 하는데, 저는 반대로 했어요. 이 집은 뭐가 맛있고, 어떤 순서로 먹어야 하는지, 이모님한테 어떻게 말해야 더 맛있는 걸 얻어 먹을 수 있는지… 할 말이 너무 많은 거예요!”

싸고, 맛있고, 심지어 힙하기까지 한 노포들에 20대의 관심이 쏠렸어요. 네번째 게시물만에 팔로워 1만을 넘기더니, 지금은 5만이 넘어요.

JY투어를 공개 모집하면 1시간 만에 메시지 300통이 몰려요. 충무로 인현시장의 낙지볶음, 을지로의 연탄구이… “이제 문을 닫아야겠다”던 사장님들이 다시 기운을 냈고, 최 셰프는 중구청장 표창을 받았어요.

“저는 굉장히 고집스런 요리사였고, 요리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10년쯤 되자 ‘인간에게 요리는 무엇인가.’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어요.

JY투어에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 답을 찾았습니다. 요리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는 것을 말이죠. 사람은 갈수록 외로워지지만, 그래도 밥은 매일 먹잖아요. 요리는 사람의 행복을 책임지는 가장 일상적인 존재예요.”


최정윤 셰프는 한식을 젊은 세대에게 알리기 위해 JYTOUR 계정 운영을 시작했다. 2023년 현재, 팔로워는 5만4000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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